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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다이어리6] 그들은 카스트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기사승인 2016.12.08  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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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민들은 카스트로를 어떻게 생각해요?”

쿠바를 49년간 통치한 ‘영원한 사령관’ 피델 카스트로가 타계한 뒤 자주 듣는 질문이다. 물론, 내가 쿠바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얼마 전에 현지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혹시나 해서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여행자인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인할 재간도 없거니와, 설령 물어본다고 해도 그 나라 국민의 총의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 쿠바에 있을 때는 카스트로 위독설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나돌았다고 해도 여행자가 들을 만한 소문은 아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쿠바 국민의 카스트로에 대한 생각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최소한 ‘쿠바에 살고 있는 쿠바인’들에게 카스트로는 외부에 알려진 만큼의 ‘독재자’는 아니었다. 존경까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살아서 스스로의 ‘위인화’ 작업을 한 적이 없다든가 하는, 크게 비뚤어지지 않은 삶의 궤적도 그런 평가의 배경이 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세 마르티 기념비가 우뚝 서 있고, 체 게바라와 시엔 푸에고스의 얼굴이 건물 하나씩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혁명광장에 가도 카스트로의 얼굴은 없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카스트로가 축재를 했다는 등의 뒷얘기도 듣지 못했다.

쿠바 아바나 혁명광장 건물에 조성해 놓은 게바라 얼굴

하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아주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카스트로가 타계한 뒤 쿠바 국민들이 보인 반응이 차라리 현실에 가까울 것 같다. 카스트로가 타계하고 장례식이 열릴 때까지 쿠바의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았다. 11월 25일 임종하고 12월 4일 장례를 치렀으니 무려 10일 동안이다. 술과 음악과 춤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쿠바사람들로 보면 엄청난 사건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숨 막히는 강요가 상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신을 통해 들려오는 아바나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상상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바나의 한 시민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카스트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의 사령관”이라고 그를 기렸다. “고통스럽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카스트로의 모교 아바나대학 캠퍼스 광장의 아스팔트엔 하얀 분필로 “당신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피델은 우리 안에 영원히 산다”는 등의 추모 글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도 있었다. 카스트로가 타계하자 쿠바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 등 쿠바계 주민 밀집 지역에서는 주민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다. 심지어 세계 최대 미술장터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는 카스트로의 죽음을 축하하는 메시지로 가득한 벽화가 등장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마이애미는 지리적으로 쿠바와 이웃이다.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 50만 명 이상이 쿠바를 탈출해 미국으로 갔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는 반응은 카스트로가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그는 늘 엇갈린 평가 속을 오갔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것은 물론 사회개혁을 단행했고 서방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싸운 인물로 평가된 반면, 장기집권을 하고 반대쪽 인물들을 과격하게 처단한 독재자로도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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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계적인 독재자의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미국의 전략도 큰 몫을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에서 그를 끊임없이 독재자로 몰아붙인 배경에는 냉전이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뒤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민간기업 국유화, 외국자본 몰수 등을 강행한 카스트로는 미·소 냉전 속에서 소련 편에 섰다가 1961년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이어 1962년에는 소련 핵미사일의 쿠바 배치를 시도하다 미국과 일촉즉발까지 가는 ‘미사일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니 서방으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의 카스트로

물론 카스트로가 정적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도 독재자라는 이름을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3년에는 반체제 인사 75명을 투옥하는 ‘검은 봄’ 사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숱한 사람들이 쿠바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를 실각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심지어 638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코미디 같기도 한데, 예를 들면 카스트로의 시가에 독극물을 바르거나 시가폭탄, 밀크셰이크에 독약을 타는 등 기상천외한 수법까지 시도됐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외국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쿠바인들에게 카스트로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문맹률을 없애기 위해 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 쿠바를 의료 대국으로 만든다는 의지를 갖고 3000명에 불과하던 의사 수를 8만 8000명으로 늘렸다. 쿠바의 의료 능력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반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전방위적으로 국제 의료봉사단을 파견하고 있는 쿠바가 의료 모범국으로 자리 잡은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경제를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40년 이상 지속된 미국의 경제봉쇄와 후원국 소련의 붕괴는 쿠바를 비료 한 줌 구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국가경제를 대부분 사탕수수에 의존했기 때문에 별다른 산업기반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물자가 부족하니 먹고 사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컬한 결과도 있었다. 농약과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유기농법을 갖춘 나라가 됐다. 유기농법을 배우러 세계에서 찾아가는 배경이기도 하다. 또 물자부족은 쿠바가 관광산업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됐다.

글을 정리할 때가 됐다. 쿠바 국민들은 피델 카스트로를 어떻게 평가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이 명제에 대해 확답할 방법이 없다. 결국 다시 한 번 카스트로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외신이 전한 스케치를 빌려올 수밖에 없다.

BBC는 쿠바 제2의 항구도시이자 '혁명의 도시'로 불리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열린 카스트로 전 의장의 마지막 장례식 소식을 전하며 ”수천 명의 국민과 국가 수장들이 참석해 추모했다”고 했다. 또 “이날 산티아고 데 쿠바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피델은 영원하다’, ‘내가 피델이다’를 외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카스트로는 언제쯤 자신의 죽음이 올 거라는 걸 예견한 것 같다. 올해 4월 그는 “누구나 차례가 온다”는 말로 파란만장했던 한 생에 작별을 고했다.


이호준 sagang@medias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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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칼럼리스트 sagang@mediasoom.co.kr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나를 치유하는 여행> 등의 여행서, 산문집과 캘리그래피 시집 <사랑은 저 홀로 아름답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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