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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티아고 순례길 10] 사뿐히… 40km를 걷다

기사승인 2017.01.05  07: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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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동이 트기 1시간 전부터 걸었습니다. 나바르네트의 알베르게를 나서니 자욱한 안개로 이슬비가 내리는 듯했지요. 그간 미뤄진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40km에 가까운 걷기를 시도해 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내 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일정이 급한 동행에게 부담을 줄까봐 먼저 6시에 출발하게 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어두운데 혼자 보내는 것이 염려도 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길은 그렇게 가야 하는 걸요. 마지막 인 듯 인사를 나눕니다. 물론 다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수 있겠지만요.

나도 먼저 떠난 동행이 일찍 일어나 싸놓은 아침 점심 샌드위치를 챙겨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안돼서 가로등 아래서 동동거리고 서 있는 그녀를 만납니다.

마을길은 어떻게 혼자서 가겠는데 어두운 들길은 어림도 없지요. 바로 따라오길 잘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걷자 그녀의 걸음에 내가 맞추기 힘들기 시작하고 발에 무리가 갑니다. 삶이 힘든 이유는 자기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 그렇게 살 필요도 있지만 자기 길을 놓치면 남도 힘들고 나도 힘듭니다.

날이 밝아오자 그녀에게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하고 먼저 보낸 뒤 나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사뿐히 걷기’를 하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사뿐히 걷지 않고 있습니다. 가만히 발을 옮겨 봅니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들숨 날숨에 맞추어 걸어봅니다. 지독히 아프던 발의 통증이 가시기 시작하네요.

짐이 무거우면 사뿐히 걸으면 됩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이렇게 사뿐히 걷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를 알아갑니다

삶이 가볍고 편하지 못해 사뿐히 걷지 못하는 거지요. 사뿐히 걷는 연습이 일상에서 깨어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지만 또 반대로 가볍고 편한 삶으로 사뿐히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 사뿐히 걸을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요. 사뿐히 걸어야 삽니다. 몸에 힘을 빼고 내 페이스에 맞추어, 그리고 짐을 가볍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햇살이 퍼지기 전 아침 안개와 함께 부는 겨울다운 바람에 온 몸이 얼어붙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니 다시 온기가 찾아옵니다. 역시 움직여야 삽니다.

위축되지 않고 직면해야 길이 열립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홍해를 가르고 앞으로 가려면 지팡이를 들고 한발을 떼는 수밖에 없습니다.

홀로 걸으며 잠시 찾아오는 햇살이 좋아 가만히 앉아 기도와 명상에 드니 그 순간이 천국입니다. 그런 행복으로 미칠 것 같지요.

밀밭 어린잎들의 싱그런 내음이 가득한 들판에 앉아 있으니 스치는 바람, 귓전에 들리는 새소리, 온몸을 적시는 햇살, 안개의 촉촉함까지 나를 평화 속에 잠기게 합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던 길이 이제 나를 환희와 희열에 들게 합니다.

순간입니다.

안개를 걷으며 찾아오는 햇살이 좋아 여기 그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런 순간은 가야할 길도 지나온 길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의 고요보다 더 큰 절대는 없지요. 지나온 날의 후회도 내일의 염려도 그렇습니다. 지금 찾아온 바람 한 점이면 족합니다.

길의 진리네요. 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길 위에 있습니다. 홀로이고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없이 있지요.

아, 좋다!

그뿐입니다.

그러나 또 길은 가야합니다. 또 다시 절뚝거리며 아픔이 여전한 길을 가야하지요. 그래도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보는 즐거움으로 일상을 배우고 특별한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촉촉한 안개 속을 걸었습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 산토 도밍고입니다.

오늘 드디어 40km를 걸었습니다.

<<나헤라의 어느 공장 담벼락에서>>

먼지, 진흙, 태양과 비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리고 천년이 넘은 세월 속에
수 천 명에 수 천 명을 곱한 순례자들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불렀는가
어떤 신비한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그것은 별들의 땅도, 대성당도, 나바라의 산악도 아니며
리오하의 와인도, 갈리시아의 해산물도, 까스틸리아의 넓은 들판도 아닐진데

순례자여 누가 당신을 불렀는가
어떤 감춰진 힘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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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까미노에서 만나는 인연들도
시골의 풍습도
역사와 문화도 아니며
깔사다의 닭들도 가우디의 궁도 폰페라다의 성채도 아닐 것이다

스쳐지나가면서 보는 모든 것과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보는 즐거움
그러나 더 심오한 곳에서부터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밀어주는 힘
나를 이끄는 힘을 나 자신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로지 그만 아실 것이다

(20151206 #산티아고 10일 560.9km) 나바르네트 - 산토 도밍고)


오동성 eastsain@chol.com

<저작권자 © 미디어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오동성 eastsain@chol.com

목사, 2004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목회와 공동체 일을 해왔고 지금은 토론토의 한인 양로원에서 어르신들의 노년을 섬기며 여행과 명상, 일상생활을 통해 길 위에서 하늘을 보고 나를 찾아가는 안내를 하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과 함께 유가족과 연대하여 세월호 진상규명과 그를 통한 안전한 사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
· 저서 : 지금 여기 그리고 당신과 함께, 다른 우리
· 역서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나마스테
https://www.facebook.com/easts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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